얀 치홀트(Jan Tschihold, 1902~1974)는 타이포그래피와 밀접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레터링 아티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필법에 흥미를 느껴 라이프치히 아카데미에서 레터링을 공부한 후 타이포그래퍼가 되었다. 1923년에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관람하고 순식간에 뉴 타이포그래피 사상에 빠져 들었다. 이후 그는 10여 년간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 방식을 버리고 뉴 타이포그래피의 강력한 지지자로 나섰다.
1925년에 잡지 <타이포그래픽 뉴스>에 ‘타이포그래피의 원리’를 발표하며 체계적인 이론 정립에도 앞장섰다. 1928년에 그가 쓴 <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는 새로운 사상을 인쇄업계에 명확하게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이다.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의 작업이 제한된 소수를 대상으로 벌인 비주류 활동이었다면 치홀트의 뉴 타이포그래피 운동은 식자공이나 인쇄공을 대상으로 한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활동이었다. 뉴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정보 전달의 명료함이다. 그는 대비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비대칭적인 디자인은 새로운 기계 시대를 표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나치의 박해로 스위스 바젤로 이주한 후부터 치홀트는 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신념을 버렸다. 시각 언어를 정화한다는 뉴 타이포그래피의 사상이 어딘가 파시즘과 닮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전통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연구로 되돌아가 세리프 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문용 서체인 사봉(Sabon)은 그가 평생에 걸친 연구와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대표적인 세리프 체이다.
치홀트는 바젤의 벤노 슈바베 출판사, 비어카우저 베르라그 출판사와 런던의 룬트 험프리사 등과 함께 많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남겼다.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는 영국 펭귄 출판사의 고문으로 초청되어 500여 권의 책을 디자인 하였다. 펭귄 출판사를 위한 <펭귄 식자 규정(Penguin Composition Rules)>을 만들어 북 디자인의 표준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치홀트는 일생 동안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식견을 잃지 않으며 타이포그래피가 더욱 전문적인 분야로 자리 잡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1965년에 런던의 명예왕실 산업디자이너로 선정되고 라이프치히의 구텐베르크 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