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비우다.
어렸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일본말, 중국말, 미국말, 독일말 들을 직접 할 수는 없어도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해왔으므로
각 나라 '말'에 대한 특성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경쾌한 중국말, 조곤조곤한 일본말,
부드러운 미국말, 절도있는 독일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 말인 한국말은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한국말이 언어적 기능인 의미를
배제한 단순한 소리로서 어떤 느낌일지 말이다. 우습게도 별것도 아닌 그 호기심에 오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각을 비우는 것 이었다. 머릿속을 아주 하얗게 말이다.
'아무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조차 생각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극히 동물 본연의 모습, 원초적으로 돌아가 언어를 단순히 소리로서 느끼려 하였고 끝내
한국말을 아무 의미없는 오직 소리로서 듣는데 성공하였다. 내 기억에 그때 들렸던 한국말은
다른 여러나라의 말들에 비해 굉장히 차분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어렴풋 기억하기로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해결된 이후 깨끗히 잊고 지냈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때를 회상하는 이유는 버스창가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생각을 비우다'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게된 과정은 이러하다.
최근들어 불운이 많이 따랐고, 예기치 않은 실수들로 스트레스가 누적되고 있던 요즘이었다.
일상의 나날, 버스안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선율이 너무 밝고 산뜻했으며
마침 창밖의 경치도 포근하게 아름다웠고, 선선한 에어콘 바람과 더불어 아주 평범한 일상
찰나의 순간에 쾌락에 가까운 행복을 느꼈다. 말하자면 아주 사소한 것들, 일상속 작은것에서
우러나오는 감사함을 운좋게도 깨달았다. 나란 녀석은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태어났지만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며, 편안한 첨단 과학기술의 혜택을 아주
당연한듯이 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말이다. 대기업이 다니는 것도 아닌,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키가 크다거나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한 군중속의
한명일 뿐이지만 나는 행복하다. 그제서야 십여 년 전 생각을 비우는 연습을 했던 그 언제적이
생각났다. 시간은 날로날로 우리의 주변환경을 보다 아름답게, 더욱 편안하고 쉽게 만들어 주고
있지만 대중은 거기에 편승하여 적응할 뿐 그곳에서 행복을 느낄줄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비우니 주변 소소한 모든것들에 감사하다. 마음만 먹으면 부담없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와 술한잔 기울일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며, 명품은 아닐지언정
수백 수천 개의 옷들중 내 기호에 맞는 옷들을 선택하여 입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다.
컴퓨터 못지않는 성능의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정보검색과 게임, 은행업무와 음악 및 영화감상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전의 핸드폰보단 더욱 얇고 가벼워졌다.
행복과 불행을 항상 상대적인 관념으로 저울질 해오는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절대적인 환경들은 인간이란 한 마리 동물로 태어나 경이롭게도 가까이에서, 폭넓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지금 돈한푼 안들이고 이 블로그에 글과 고해상 사진들을 업로드하고
자동으로 RSS에 등록되어 여러 수고를 줄일 수 있는것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비우면 세상사는 하나하나가 감사하다.
무더운 폭염속에서 에어컨 덕분에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만끽하는 공간에서 이만 글을 줄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