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난 정말이지 우물안의 개구리 인것 같다.
더 많은것을 보고 더 많은것을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할수 할수있는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필히.
내가 하는일에 자긍심도 더 가져야할 것이고고 용기도 더 가져야 할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것도 중요하지만 내 가치를 키워 더 멀리 내다볼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큰 실수나 굴곡없이 살아온게 어찌 생각하면 정말 안정적인 것 만을 추구하며
재미없게 살아온게 아닌가 싶다.
너무 소심하고 게을렀고 겁냈던 듯.
아직 늦지 않았으니 분발하자 분발 !!
욕심낼 것엔 안주하지 말고고 미친듯이 욕심내고
그 외에엔 작은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가짐으로 삶에 임해야지.
대개 사람들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동하여 사용하곤 한다.
워낙 빈번히 틀리기 때문에 방송에서도 육성으로는 '틀리다' 라 말하고
자막으로는 그것의 정확한 뜻을 바로잡아 '다르다'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언어적 정의의 혼동이라 생각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
언어적 정의 역할의 혼동 이외에도. 그 뜻을 충분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고 지속해서 배워왔지만 사람들은, 아니 나 또한
다른 것을 틀리다고 옳지 않다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 같다.
일인칭 시점으로 너무 익숙해져 뿌리박혀버린 가치관이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스스로 옳다고 정립하고,
부실한 변명의 응집체들로 자기 세뇌 또는 자기 위안을 일삼기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이 들게 된 계기는 새로운 환경 혹은 여러 기회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나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다양성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가슴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이 아주 옳으냐고 한다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할 배짱도 없으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대체로 자기중심적으로 치우쳐 사고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위해 편협한 생각으로 자기 객관화시키곤 한다.
스스로 내리는 자기객관화가 객관성이 있을 리 없다.
요컨대'보고 싶은 방식으로,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 것' 처럼 말이다.
그간의 다양한 사건들과 여러 사람과의 마찰에서 줄곧 스스로 정당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다름'을 줄곧 '틀림'으로 부정해 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되었다.
문제의 원인이 100% 나에게 있다고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왜곡된 시선이 나에게 있었음을
스스로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좌우명처럼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
그 누구도 답의 옳고 그름을 왈가왈부하여 판단할 자격을 갖출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 없는 세상인 만큼 다양성을 쿨하게 인정하고 배려심 깊게 포용해야 하는데 난 아직 그 그릇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아직 많이 겁내고, 아직 많이 눈치를 보고 아직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 또한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 동안 이렇게 살아왔는데 내가 이렇게 꽉막히게 살아왔다는걸 찬바람 맞으며 달리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지금이나마 자각한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뇌 기억력의 유한함.
뭔가 번뜩 떠올라 포스팅하려고 창까지 띄워놓고
잠깐 메세지온 것 답장해주는 사이 내가 무얼 쓰려고 했는지 깨끗이 잊어버렸다.
스물여섯 .. 두달만 지나면 스물일곱의 나이..
여자였으면 4년제 나와서 사회 2~3년차는 되었을 나이인데 정작 내 수준은 어디있는지..
사념도 없애고, 쓸데없이 시간낭비 하는 잡다한 것들 싸그리 포맷해버려야지
하루 평균근로 8시간으로 쳤을때, 난 일을 관두고 정작 8시간 아니 6시간 정도라도 공부에 집중하고 있나.
외우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응용하고 창조 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이 있는것인지.
즐기지 못한다면 노력하고 노력할 자신 없다면 집착하고 집착마저 힘들다면 억지로 궁둥이 붙히고 작업창 띄워놓자.
알면 하라.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주저없이 실천 고고
캘리그라피 단기수강을 들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이걸 배워서 어디 써먹을 데가 있을까 하는게 가장 고민되는 큰 이유이다.
시간이야 일주일에 두시간씩이니 잠좀 덜잔다치면 시간이 아쉽지는 않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질러버려야하나.. 기왕이면 할줄 모르는 것 보다야 할 줄 아는것이 나으니깐 말이다.
앞으론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시간을 정해놓고 컴퓨터 전원을 켜야겠다.
드로잉 하는 시간도, 기획하는 시간도 늘리고, 책을 통한 이론 공부도 중고등학교때 내신공부 하듯 요약정리 노트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해야겠다.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고 시험을 보거나 채점할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가 내실력을 가장 노골적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제일 중요하다.
학창시절때도 1학기 중간고사 성적이 2학기 기말고사 까지 가고..
1학년때 마음가짐이 4학년 때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짧은 인턴기간을 마치고 이제막 취준생이 된지 이틀째인 요즘, 마음가짐을 확실히 해야겠다. 몸이 무거우면 어디로든 발걸음 옮겨 부패한 두뇌를 환기시켜 주어야지.
오늘의 반성 2012/10/9
세상에 답이 어디있어.
살아가는데 답이 어디있어.
세상 살아가는데 답이 어디있어 ?
라고 입버릇 처럼 얘기하곤 한다.
나도 동의한다 씨바 세상 사람들 다 가지각색인데 도대체가 답이란게 뭔데
답이 없다는 것에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 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답을 추론하는 과정에는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 또한 내 경험과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답을 추론하기 까지의 논리와 신중함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라는 조직에 있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선을 넘지는 않는지
이러한 여러 조건조건들을 융통성있게 적용시켜 나가면
세상에 분명 답은 존재 하지 않지만 답에 가까운 삶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즉, 답이라는 종착지는 없는게 아니라 어딘가에 있지만 사람들마다 가지각색일 뿐 그 방향성 자체는 일관되다는 것이다.
답이 없다고 함부로 오해하고 오역하면
세상에 답이 어딨어 될대로 되라그래 씨바, 뭐 인생 뭐있어? 한방이야 등등의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때문에
쉽게 내뱉는 답이 없다라는 말일지라도 어느정도의 신중함과 논리는 필수라는 간밤의 생각이다.
생각을 비우다.
어렸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일본말, 중국말, 미국말, 독일말 들을 직접 할 수는 없어도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접해왔으므로
각 나라 '말'에 대한 특성을 알고는 있을 것이다. 경쾌한 중국말, 조곤조곤한 일본말,
부드러운 미국말, 절도있는 독일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 말인 한국말은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한국말이 언어적 기능인 의미를
배제한 단순한 소리로서 어떤 느낌일지 말이다. 우습게도 별것도 아닌 그 호기심에 오기가
발동하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각을 비우는 것 이었다. 머릿속을 아주 하얗게 말이다.
'아무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조차 생각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극히 동물 본연의 모습, 원초적으로 돌아가 언어를 단순히 소리로서 느끼려 하였고 끝내
한국말을 아무 의미없는 오직 소리로서 듣는데 성공하였다. 내 기억에 그때 들렸던 한국말은
다른 여러나라의 말들에 비해 굉장히 차분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
어렴풋 기억하기로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해결된 이후 깨끗히 잊고 지냈다.
십여 년이 지나서야 그때를 회상하는 이유는 버스창가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생각을 비우다'라는
개념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하게된 과정은 이러하다.
최근들어 불운이 많이 따랐고, 예기치 않은 실수들로 스트레스가 누적되고 있던 요즘이었다.
일상의 나날, 버스안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선율이 너무 밝고 산뜻했으며
마침 창밖의 경치도 포근하게 아름다웠고, 선선한 에어콘 바람과 더불어 아주 평범한 일상
찰나의 순간에 쾌락에 가까운 행복을 느꼈다. 말하자면 아주 사소한 것들, 일상속 작은것에서
우러나오는 감사함을 운좋게도 깨달았다. 나란 녀석은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태어났지만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며, 편안한 첨단 과학기술의 혜택을 아주
당연한듯이 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말이다. 대기업이 다니는 것도 아닌,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키가 크다거나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은 아주 평범한 군중속의
한명일 뿐이지만 나는 행복하다. 그제서야 십여 년 전 생각을 비우는 연습을 했던 그 언제적이
생각났다. 시간은 날로날로 우리의 주변환경을 보다 아름답게, 더욱 편안하고 쉽게 만들어 주고
있지만 대중은 거기에 편승하여 적응할 뿐 그곳에서 행복을 느낄줄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비우니 주변 소소한 모든것들에 감사하다. 마음만 먹으면 부담없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안주와 술한잔 기울일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으며, 명품은 아닐지언정
수백 수천 개의 옷들중 내 기호에 맞는 옷들을 선택하여 입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이다.
컴퓨터 못지않는 성능의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정보검색과 게임, 은행업무와 음악 및 영화감상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전의 핸드폰보단 더욱 얇고 가벼워졌다.
행복과 불행을 항상 상대적인 관념으로 저울질 해오는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절대적인 환경들은 인간이란 한 마리 동물로 태어나 경이롭게도 가까이에서, 폭넓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지금 돈한푼 안들이고 이 블로그에 글과 고해상 사진들을 업로드하고
자동으로 RSS에 등록되어 여러 수고를 줄일 수 있는것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비우면 세상사는 하나하나가 감사하다.
무더운 폭염속에서 에어컨 덕분에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만끽하는 공간에서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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